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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

궁금하다. 천 년 후 사람들은 과연 어떤 일에 충격을 받은지, 혐오를 느낄지, 공포를 느끼고 불안해할지, 모멸감에 빠질지, 어떤 일을 비난하고 조롱할지, 어떤 자를 미친 자라고 부를지. 어떤 이야기에 공감하고 무엇을 갈망할지. 천 년 후의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그때에도 돈이 존재를 결정할까. 대체 뭘 먹고 살까. 자금의 '인간적'이라는 말과 천 년 후의 '인간적'이라는 말은 얼마나 다를까....

p.10

터무니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 믿음은 아주 유용하다. 말도 안돼,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일에야 믿음이란 단어를 갖다붙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일단 믿으라, 그러면 말이 된다.

p.16

너는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다. 내가 본 마지막 세상은 너여야 했다.

p.17

상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구가 사라졌을 때, 쫓길 때, 협박에 시달릴 때, 시든 국화처럼 지쳐 잠든 구를 맹하니 바라보던 어느 고요한 밤에도 나는 상상했었다.

구가 먼저 죽으면 어쩌나.

구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어야지 마음먹었다. 하지만 내가 따라 죽으면 우리의 시체는 어찌 되는가. 누가 우리를 거두어 줄 것인가. 공무원이 우리를 가져가 태우겠지. 가져갈 때도 접수할 때도 태울 때도 구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구가 나에게, 나에게 구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 몸에 새겨진 기억과 추억 같은 것..... 상상하지 않겠지. 죽은 동물을 옮기고 태우듯 그러겠지. 우리 몸은 그렇게 사라지겠지. 내 몸이 그리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구를 그리 둘 수 는 없다.

 

p.20

너를 먹고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을 거야. 우리를 사람 취급 안 하던 괴물 같은 놈들이 모조리 늙어죽고 병들어 죽고 버림 받아 죽고 그 주검이 산산히 흩어져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나는 살아 있을 거야. 죽은 너와 끝까지 살아남아 내가 죽어야 너도 죽게 만들 거야. 너를 따라 죽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죽게 만들 거야.

네가 사라지도록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살아남을 거야.

살아서 너를 기억할 거야.

 

p.21

할아버지는 모두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돌아가셨다. 언제가는 말해줄 작정이었겠지만, 당신도 당신이 그리 느닷없이 죽업ㅓ릴 줄은 몰랐겠지. 애고 어른이고 우린 도통 아는 게 없었다. 이런저런 생활의 지혜 같은 것은 기가 막히게 잘 알면서도, 자기 삶을 관통하는 아주 결정적인 사실은 모른 채로, 때로는 모르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로 우리는 그럭저럭 살았던 것이다. 그런 비밀은 모르는 게 나은 때도 많다. 알아봤자. 생각은 복잡해지고 골치만 아프고, 어떤 경우에는 자기 삶을 아예 부정하고 싶어지기도 하니까.

 

p.23

울면서도 모르는 게 죄냐고 물었다. 이모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 대답이나 설명보다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고,. 더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지금 이해할 수 없다고 묻고 또 물어봤자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모르는 건 죄가 아닌데 기다리지 못하는 건 죄가 되기도 한다고, 이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p.23

내가 지금 죽어버리면 그건 영영 모르는 게 되잖아!

 

p.23

하지만 나는 계속 말을 하고 싶었다. 이모와 말하는 게 나의 유일한 놀이이자 사랑표현이었으니까.

그때 나는 세상에서 이모만을 사랑했다. 이모에게 내 사랑을 모두 쏟아부었고, 쏟아붓는 만큼 받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모는 나를 먹여살리기 위해 돈을 벌었다. 밤낮으로 부지런히 무언가를 만들어서 돈을 버는 것. 그것이 이모의 사랑표현이었으니까.

 

p.25

괴롭다는 것은 몸이나 마음이 편하지 않고 고통스럽다는 뜻이다.

괴로움 없는 사랑은 없다.

 

p.26

구의 집은 이모와 내가 살던 집에서 걸으면 십 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우리는 같은 길을 걸으며 같은 놀이터에서 같은 그네를 타고 같은 목욕탕을 다녔다. 그런데도 길이나 놀이터에서 마주친 적은 거의 없어서, 때로는 여기 어디 구가 없나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보기도 했다. 둘러볼 때마다 구는 없었고 나는 묘한 서운함에 빠졌다. 그러다 내가 꾀병을 부려 학교에 가지 않은 날 구도 무엇때문인지 학교에 가지 않았고, 평일 오전에 학교가 아닌 적막한 골목에서 우리는 딱 마주쳐버렸다. 그날 그 낮 그 골목에서 사람이라곤 구와 나 둘 뿐이었다. 서로를 본 우리는 서투르게 웃으며 서서히 걸음을 멈췄다.

너 왜 여기 있어?

넌 왜 여기 있어?

구와 내가 서로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는 의문보다 반가움이 더 짙게 묻어 있었다. 여기에 마침 네가 있어 이제야 말을 걸 수 있게 되었으니 설레고도 기뻐하는 마음이.

 

땅에서 내 대답을 캐낼 것처럼.

 

 

p.30

담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 담이와 보내는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 담이 하는 것은 나도 하고 싶었고, 담이 가는 곳에는 나도 가고 싶었다. 나쁘지도 올바르지도 않은 채로, 누가 누구보다 더 좋은 사람이다 그런 것 없이 같이 있고 싶었다.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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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

"붓다도 제자들한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누가 그 말을 듣긴 들었냐? 온 아시아가 절로 뒤덮였지, 십 주기니까 딱 한번만 지내고 싶어."

p.11

우윤은 할머니가 행복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가진 조각들이 다르네, 할머니가 나눠준 조각들이 다른가보네,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 하지 않았다.

p.13

누군가의 부인이란 설명이 먼저 오는 것에 아연함을 느꼈었다. 이렇게 대단한 걸 그려도 그보다 중요한 정보는 남성 화가의 배우자란 점인지,

p.14

대중의 가벼운 사랑과 소수의 집요한 미움을 동시에 받았다. 쉽사리 희미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대에 따라 다른 평가를 받았는데 세상을 뜨고 십 년이 지나자 사람들이 어디선가 자꾸 조각 글과 영상들을 발견해냈다.

p.16

분노를 연료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비웃어주고 싶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나와 내 할머니만 알고 있다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p.17

폭력성이나 비틀린 구석이 없는 상대와 좋은 섹스.

p.18

베이직을 갖춘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고 봅니다. 안쪽에 찌그러지고 뾰족한 철사가 있는 사람들, 배우자로든 비지니스. 파트너로든 아무데도 못 갖다 써요. 꼭 누군가를 해치니까.

p.18

사람에게 모든 것을 구하면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지 않을까요?

p.19

사흘에 한 번씩 섹스를 하고 싶은 사람들 말고는 결혼을 안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p.21

낙관을 위해,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만한 게 없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키워놓았더니 미국으로 날아가버렸지, 내 딸....

p.21

난정은 우윤이 보고 싶어 내내 우는 대신 계속 읽었다. 읽고 읽었다. 소원을 비는 사람처럼 책탑을 쌓았다. 딸이 남기고 간 빈 공간을 책으로 채웠다.

 ? 아인가베 Eingabee

? 아우스가베 Ausgabe

p.23

"그렇게 많이 읽는데? 별의별 것에 대해 읽는데?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애벌레처럼 읽는 사람은 결국 쓰게 되는 거야."

p.23

"그렇게 단언하시면 안 돼요. 세상에 단언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고, 단언하는 사람은 쉬이 믿으면 안 된다고 어머님이 네번째 책에서 한 단원 분량으로 말씀하셨잖아요?"

p.24

"말을 너무 많이 했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사실 잘 안나. 너희 먹여 살리려고 그런 건데 이런 배응망덕한 것들..."

"엄마가 재작년에 자식들에겐 절대 보상을 바라면 안 된다고 신문에 썻잖아.

p.24

언제나 교양인은 아니었다. 외국어도 잘하고 욕도 잘하는 사람이었고, 어쩌면 그것은 같은 능력일지도 몰랐다.

p.25

일 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딸을 만났고 그것은 이제 살면서 운이 좋아야 서른 번 남짓 더 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p.27

파들파들한 신경으로만 포착해낼 수 있는 진실들도 있겠지요. 단단하게 존재하는 세상을 향해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행위는 사실 자살을 닮았을 테고요. 그래도 너무 많이 잃었습니다.

p.34

명백한 피해자는 이쪽이니까 아무도 명은을, 명은의 혼자-됨과 혼자-삶을 힐난하지 못했다. 요즘과는 달리 명은의 젊은 날엔 혼자 사는 이유를 주변에 납득시켜야 했으므로, 명은은 파혼을 기차게 이용했고 잘 먹혀들어간 것에 만족한 후 나쁜 기억을 별로 되새김질하지 않았다.

p.35

존재하지 않는 무덤에 대해 아쉬워하거나 하지 않으며 첫째와 둘째가 지난 십 년을 반추했다.

p.36

공부를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다면 좋았을 터지만 세상일은 마음대로 풀리지 않으며 좋은 사람도 나쁜 일을 당한다.

p.36

우리가 했던 악수는 마치 계약 후에 나누는 악수와 같았는데, 맞잡은 손이 참 단단했는데, 이제 나 혼자만 남아 약속을 지키고 있다.

p.38

일 년 내내 회색 옷에 검은 캡모자를 썼다. 그러면 박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p.38

"좀 화려한 색깔 새를 좋아하면 좋을 텐데, 걔도 참."

p.39

"아니, 뭐 내가 레이스 치마를 입히겠대? 줄창 회색만 입지 않았으면 하는 거지. 내가 디자이너인데 딸이 색깔에 관심이 없는 건 속상하다고. 세상에 색깔들만큼 멋진 게 또 없는데.

p.39

세상 사람들이 모나크나비의 이동에는 관심이 많으면서 된장잠자리엔 너무 없다고,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외모 차별이라고 늘 분개해 있었다.

p.39

치우치고 치우친 둘째는 학교를 그저 견디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 걱정하는 건 세상에 경아뿐인듯 했다.

p.41

아빠와 두 엄마를 생각하면 각기 다른 마음으로 슬펐지만 특별한 날이 아니면 슬픔이 일상을 지배하진 않았다.

p.41

"내 인생, 남편은 잠자리 쫓아다니고 딸은 새 쫓아다니고."

p.41

이제 없는 사람들이 운전하는 차에 좁게 끼여 앉아 투닥거리던 시간들이.

p.41

"아, 그럼, 영혼이 닮을 수 있지."

p.42

어릴 때는 그 삶을 원했던 적도 있는 듯한데, 이제는 이 삶이 아닌 삶을 상상할 수 없으니 짐작 불가능한 시간을 저도 모르게 통과해온 셈이었다.

p.43

고되고 고되면서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는 게 신기했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다니

p.43

그게 인간이란 생각을 했다.

p.44

마우어는 전 세계가 자신에게 암시를 준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지침을 주고 방향을 주고 영감을 준다고 말이다.

p.44

마우어가 여행 수집품처럼 나를 수집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에는 나름의 맥락이 있었다.

p.44

20세기 여자들이 교육의 기회라는 말에 따라나섰던 수많은 길들은 정말 교육에 닿기도 했고, 위험한 나락에 닿기도 했다. 

p.44
그럼에도 교육과 기회를 원했던 여자들을 생각하면 울고 싶어진다.

p.44
벌어질 일들을 하나도 모른 채, 신문에도 나는 유명한 사람이니 좋은 사람일 거란 두번째로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도박을 했다.

p.45
마우어가 나를 그의 ‘하와이안 걸로 불렀던 것은 나에게도 하와이 사람들에게도 무례한 대접이었다.

p.45
“엄마, 제발...... 난 밤에 일하는 사람이잖아. 깰 때까지 안 깨우면 안 돼?”

“밤에 일하는 게 뭐 자랑이라고? 얼른 가서 화수도 깨워.”

p.47
“엄마 세대는 외모에 너무 집착해. 눈만 마주치면 평가하는 말들을 한다고. 하루라도 좀 외모 생각을 하지 않고 보내봐.”

p.48
형편없는 공간에서 다시 형편없는 공간으로 뜀뛰기를 하며 살면서도 독립을 유지하고 가끔만 부모의 집에 들렀다.

p.49
기대대로 되지 않았을 때 꺾여버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p.50
지수는 “네가 화수 동생이라고?”라는 말을 반복해서 들으며 자라난 오락부장이었다.

p.50
지수는 화수가 졸업과 취업과 결혼을 유능하게 운영되는 소매점의 사장님처럼 해내는 것을 보고 어이없어했다.

p.51
정말 여기는 이해할 수 업어. 이따위로 엉망인데 지금까지 유지되어왔단 말이지?

p.51
“나 엉망이야?”
“아니.”
“그럼 진창이야?”
“아니야.”

p.51
요즘은 그렇게 묻지 않게 되었다. 세상이 엉망이니까 자신도 조금 엉망이어도 될 거라고.

p.52
호방한 문지기처럼 지키고 서서 싹둑싹둑 썰어냈다. 아무것도 다행은 아니었다고 외치곤 침묵과 잠 속에 잠긴 화수가 방해받지 않을 수 있게.

p.53
그저 하와이가 화수를 반겨줬으면 좋겠다고, 지수는 생각했다.

p.310

말하는 여자는 미움받으니까. 뭐 기왕 미움받고 있는 내가 해버리자. 그런 마음도 있었습니다.

p.310

스스로를 아낄 줄 아는 사람들은 노출되는 자리를 신중히 삼갈 줄 아니 누군가는 내 또래 여자들의 이야기를 해야 했지요.

p.310

했어요, 그러나 말이란 건 그렇습니다. 일관성이 없어요. 앞뒤가 안 맞고, 그때의 기분 따라 흥, 또다른 날에는 칫, 그런 것이니까 그저 고고하게 말없이 지낼 걸 그랬다 뒤늦은 후회도 합니다.

p.312

다른 삶을 원하는 얼굴, 자기 삶을 계획하는 얼굴, 가진 것 없이 비극에서 시작해도 뭔가를 이루고 말 얼굴이었다. 턱을 청록색 퍼 워머에 묻고 먼 탈출에 눈을 던진 채였다.

p.315

"심시선 여사 닮았으면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p.315

우윤이는 약해 보이지만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왔지. 지지 않고 꺾이지 않을 거야. 그걸로 충분할거야.

p.316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p.318

관여하는 감각이 다른 장르가 어떻게 교차되는지 다시 못할 경험을 했다.

p.318

여느 때처럼 친밀감과 이해를 향해 썼다. 소설을 쓰면 쓸수록 나는 열심히 숨기고, 독자분들은 가끔 내가 숨기지 않은 것도 발견해가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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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13

영화란 '세상을 좀더 바르게, 좋게 만들기 위해,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지치고 힘들 때 위로를 주는 것'

영화만큼 그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와 사회를 명백하게 발현하는 대중예술이 없기 때문입니다. 

 

p.17

영화는 이처럼 고도의 기술력과 자본의 집중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여기서 이윤을 남기려면 국제적인 배급망이 필요합니다. 전세계 어디에서든 자본과 기술, 그리고 국제적인 배급망, 이 세가지를 모두 쥐고 있는 건 가진 자들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영화는 필연적으로 가진 자의 담론, 즉 그 사회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담론 안에서 만들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p. 18, 19

독립영화란 자본이 집중된 스튜디오와 국제적인 배급망으로부터 독립적인 영화인 것이지요. 즉 독립된 자본과 독립된 배급망을 가지고, 지배담론 너머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를 독립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한때 감독이 편집권을 가진 영화를 독립영화라고 불렀습니다. 

 

p. 25

즉 극장이 아닌 곳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 독립영화의 시작이었어요.  모든 게 다 불법이었던 것이지요. 

 

p.29

심의기준은 반드시 물리적이어야 하거든요. 예를 들어 전신 노출 장면이 몇초 이상 나왔다, 구체적인 성행위 장면이 몇초 이상 나왔다, 사람을 죽이거나 폭행하는 장면이 어떤 도구를 사용하여 몇초에 걸쳐 특정한 액션과 함계 나왔다, 이렇게 물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

.

.

연애의 온도의 경우와 같이 심적 근거를 인정하기 시작하면 '정부를 전복시킬 것 같은 느낌 때문에' '북한에 이로울지도 몰라서'라는 이유로 영화 상영을 금지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저는 그래서 이 사례가 급진적인 정치영화가 심의에 걸린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p.34

이런 것들이 '덜 민주주의'의 핵심이에요. 시민들이 후진 인간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민주주의, 시민들이 가슴만 보면 흥분해서 범죄를 저지를 거라고 믿는 나라의 민주주의인 거지요.

 

p.35

한국 독립영화의 흐름이 다시 한번 바뀌게 된 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입니다.

 

설명적인 다큐멘터리 - 화면 속의 캐릭터들은 극영화와 비슷하게 짜인 이야기 구조 안에 있고, 화면 밖의 내레이터가 실제 주인공처럼 기능하는 영화 

ex) 인간극장, 동물의 왕국

다이렉트 시네마 - 감독이 카메라에 담고자 하는 대상과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들이 더이상 카메라를 낯설어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들의 모습을 담습니다. 이때 카메라는 단순히 옵서버 역할만 합니다.

시네마 베리테 - 카메라가 개입하기 위해 존재.

ex) 장뤼크 고다르, 공동정범(용산 참사)

 

p.44

이처럼 다큐멘터리는 형식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얘기의 핵심은 그거예요. 영화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방식은 형식을 항시 염두에 두고 보라는 거예요.

 

p.48

최근에 제가 강연을 잘 안 하는 이유 중 하나인데, 우리는 항상 분노의 표적을 결정하잖아요. 뭔가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 불공정에 대해 연구하고 분석하지 않아요. 표적을 정하고 전진할 뿐이지요. 그러면 매번 누군가를 괴롭힐 수 있지만 어떤 것도 바꾸진 못해요.

 

p.55

우리 사회와 환견을 더 건강하게 바꾸는 건 결국 스스로를 '일개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모두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함꼐 무언가를 만들어야 돼'라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 환경에서는 어느 누구도 대의명분을 이유로 희생되지 않게 되는거지요. 저는 그래서 규칙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p.57

자기를 일개 무엇이라고 표현하지 마세요. 우리는 모두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의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해요. 

 

p.59

왜라는 질문의 답에 따라 우리의 관계는 바뀌어요. 소통의 목적도 바뀌고, 저는 우리가 살면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식으로 끈질기게 소통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언제나 대의명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요. 

 

p.60 

그리고 뭉뚱그려서 '그래, 우리 다음부터 잘해보자' 그러면 다 좋은 거라고, 자기 소통능력이 꽤 괜찮다고 생각하지요. 그건 소통능력이 아니에요. 그건 군대에서나 가능한 거예요. 어차피 제대하니까 2년 동안 버티기 위해서 쓰는 말이 '잘해보자'인 거지, 인생을 살면서는 어떤 경우든 ' 앞으로 잘해' 가지고 안 돼요. 지금 잘 안 되는 이유가 뭔지 알아야지요.

 

p.61

저는 영화 일을 하면서 내 문장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어가 아니라 문장요. 누군가 제게 '너는 주로 무슨 일을 하니?'라고 물으면 저는 '어부예요'라고 대답해요, 창작자가 일상적으로 하는 일은 물고기를 낚는 것과 비슷합니다. 

 

p.62

거기에 쓰인 노래들이 제 호수를 채우는 겁니다.

하지만 호수 속에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만 있는 게 아니라 살면서 영향을 받았던 여러가지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창작자는 일상적으로 그 안에 낚싯대를 들이대고 그것들을 낚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뜰채 같은 걸로 한번에 여러개를 잡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냥 기다려야 해요. 2018년에 내 안에서 형성된 담론 가운데 지금 내게 화두가 되는 것 딱 하나를 잡는 거지요.

 

제 포부는 이거예요. 사람들이 제 영화를 보고 집에 가서 자기도 모르게 영화에 나온 적도 없는 어떤 문장을 떠올리는 거예요, 제가 정확히 표현하고자 했던 그 문장을요. 그러면 저는 '내가 엄청난 일을 해낸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할 겁니다. 물론 저는 제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관객의 집에 도청장치를 설치할 수는 없잖아요. 그냥 믿는 거예요. 내가 이번에 화두로 정했던 것을 영화 어디간에 숨겨놨는데 관객들이 그걸 바로 알아채진 못하더라도 다음날 '혹시 이런 얘기였나?'라고 잠깐이라도 생각한다면 그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그러면 저는 적어도 열흘 정도는 스스로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지낼 수 있지요.

 

p.64

' 눈앞에 엄청나게 거대한 벽이 있다. 그걸 뚫고 지나가려면 한번에 부수는 대신 조그만 끌로 오랫동안 천천히 긁어내야 한다.' 라는 이 말을 성취라는 건 100미터를 18초 내에 끊는 것이 아니고, 한걸음 걷고 열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두걸음 걷고 쉬고 하는 그 순간, 한 문장이 벽 바깥에서 우리를 반기지는 않지만 그 과정 안에서 한 글자씩 나타나게 되는 거라고 해석해요.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문장을 만들거나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 제가 세상을 살아가고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어요.

 

p.65

대개 멋진 문장을 만나면 그 문장이 어디서 나온 누구의 말인지 기억하고 그 문장을 정확하게 외우려고 노력하잖아요. 하지만 저는 일부러 그걸 안 외워요. 그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 대신 그 말을 내가 왜 좋아하는지를 생까해요. 내가 왜 이 문장에 반했지? 내가 왜 이걸 계속 생각해요.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 그 문장이 제 입에서 조금 다르게 나와요. 저는 그 달라진 문장을 기억합니다. 그럼 그 말을 제가 한 말이 되는 것이지요.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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