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구의 증명 (아직 쓰는 중)

_0ina 2020. 12. 6.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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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

궁금하다. 천 년 후 사람들은 과연 어떤 일에 충격을 받은지, 혐오를 느낄지, 공포를 느끼고 불안해할지, 모멸감에 빠질지, 어떤 일을 비난하고 조롱할지, 어떤 자를 미친 자라고 부를지. 어떤 이야기에 공감하고 무엇을 갈망할지. 천 년 후의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그때에도 돈이 존재를 결정할까. 대체 뭘 먹고 살까. 자금의 '인간적'이라는 말과 천 년 후의 '인간적'이라는 말은 얼마나 다를까....

p.10

터무니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 믿음은 아주 유용하다. 말도 안돼,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일에야 믿음이란 단어를 갖다붙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일단 믿으라, 그러면 말이 된다.

p.16

너는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다. 내가 본 마지막 세상은 너여야 했다.

p.17

상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구가 사라졌을 때, 쫓길 때, 협박에 시달릴 때, 시든 국화처럼 지쳐 잠든 구를 맹하니 바라보던 어느 고요한 밤에도 나는 상상했었다.

구가 먼저 죽으면 어쩌나.

구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어야지 마음먹었다. 하지만 내가 따라 죽으면 우리의 시체는 어찌 되는가. 누가 우리를 거두어 줄 것인가. 공무원이 우리를 가져가 태우겠지. 가져갈 때도 접수할 때도 태울 때도 구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구가 나에게, 나에게 구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 몸에 새겨진 기억과 추억 같은 것..... 상상하지 않겠지. 죽은 동물을 옮기고 태우듯 그러겠지. 우리 몸은 그렇게 사라지겠지. 내 몸이 그리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구를 그리 둘 수 는 없다.

 

p.20

너를 먹고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을 거야. 우리를 사람 취급 안 하던 괴물 같은 놈들이 모조리 늙어죽고 병들어 죽고 버림 받아 죽고 그 주검이 산산히 흩어져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나는 살아 있을 거야. 죽은 너와 끝까지 살아남아 내가 죽어야 너도 죽게 만들 거야. 너를 따라 죽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죽게 만들 거야.

네가 사라지도록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살아남을 거야.

살아서 너를 기억할 거야.

 

p.21

할아버지는 모두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돌아가셨다. 언제가는 말해줄 작정이었겠지만, 당신도 당신이 그리 느닷없이 죽업ㅓ릴 줄은 몰랐겠지. 애고 어른이고 우린 도통 아는 게 없었다. 이런저런 생활의 지혜 같은 것은 기가 막히게 잘 알면서도, 자기 삶을 관통하는 아주 결정적인 사실은 모른 채로, 때로는 모르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로 우리는 그럭저럭 살았던 것이다. 그런 비밀은 모르는 게 나은 때도 많다. 알아봤자. 생각은 복잡해지고 골치만 아프고, 어떤 경우에는 자기 삶을 아예 부정하고 싶어지기도 하니까.

 

p.23

울면서도 모르는 게 죄냐고 물었다. 이모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 대답이나 설명보다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고,. 더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지금 이해할 수 없다고 묻고 또 물어봤자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모르는 건 죄가 아닌데 기다리지 못하는 건 죄가 되기도 한다고, 이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p.23

내가 지금 죽어버리면 그건 영영 모르는 게 되잖아!

 

p.23

하지만 나는 계속 말을 하고 싶었다. 이모와 말하는 게 나의 유일한 놀이이자 사랑표현이었으니까.

그때 나는 세상에서 이모만을 사랑했다. 이모에게 내 사랑을 모두 쏟아부었고, 쏟아붓는 만큼 받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모는 나를 먹여살리기 위해 돈을 벌었다. 밤낮으로 부지런히 무언가를 만들어서 돈을 버는 것. 그것이 이모의 사랑표현이었으니까.

 

p.25

괴롭다는 것은 몸이나 마음이 편하지 않고 고통스럽다는 뜻이다.

괴로움 없는 사랑은 없다.

 

p.26

구의 집은 이모와 내가 살던 집에서 걸으면 십 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우리는 같은 길을 걸으며 같은 놀이터에서 같은 그네를 타고 같은 목욕탕을 다녔다. 그런데도 길이나 놀이터에서 마주친 적은 거의 없어서, 때로는 여기 어디 구가 없나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보기도 했다. 둘러볼 때마다 구는 없었고 나는 묘한 서운함에 빠졌다. 그러다 내가 꾀병을 부려 학교에 가지 않은 날 구도 무엇때문인지 학교에 가지 않았고, 평일 오전에 학교가 아닌 적막한 골목에서 우리는 딱 마주쳐버렸다. 그날 그 낮 그 골목에서 사람이라곤 구와 나 둘 뿐이었다. 서로를 본 우리는 서투르게 웃으며 서서히 걸음을 멈췄다.

너 왜 여기 있어?

넌 왜 여기 있어?

구와 내가 서로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는 의문보다 반가움이 더 짙게 묻어 있었다. 여기에 마침 네가 있어 이제야 말을 걸 수 있게 되었으니 설레고도 기뻐하는 마음이.

 

땅에서 내 대답을 캐낼 것처럼.

 

 

p.30

담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 담이와 보내는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 담이 하는 것은 나도 하고 싶었고, 담이 가는 곳에는 나도 가고 싶었다. 나쁘지도 올바르지도 않은 채로, 누가 누구보다 더 좋은 사람이다 그런 것 없이 같이 있고 싶었다.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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